<2021 서울시향 합창 교향곡> 관람 후기(2021/12/17)

서울에 정착한 후로 연말 마무리는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으로 하는 습성이 생겼다.
지난해의 무관중 온라인 스트리밍은 대폭 편성을 줄였음에도 소리에 손실이 느껴지지 않아 역시 서울시향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누워서 편하게 듣자니 마무리가 시원치 않은 느낌이었다.

작년 패키지 대량취소의 아쉬움에 올해는 패키지 예매를 하지 않았다.
막상 연말되어보니 매진사태로 이번 공연티켓을 구하지 못하는 참사
며칠전 들어가보니 마침 취소표가 생겨서 이선좌 두번만에 취겟에 성공했다.

사실 공연이야 내년을 기약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즈음 들어 원하는 것을 미래의 나에게 맡기지 않는게 현명하다는 깨달음을 얻고 영하 10도에도 예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 간만에 제대로 보는 편성의 오케스트라 정기공연이고, 무려 매진공연
올해들어서는 펜데믹 초기에 비해 관객들의 심리적 부담이 크게 줄었음을 느낀다.
방역조치상 환호성 금지임에도 흥 많은 분들이 간혹 실수로 본능을 뿜기 시작한 즈음
갑자기 오미크론이라는 놈이 더욱 강한 침묵을 요구하는 현실이 무척 아쉽다.

원래는 음악감독인 오스모벤스케의 지휘로 준비되었던 공연
오미크론으로 인한 격리조치 때문인지 부지휘자인 윌슨응의 지휘로 변경되었다.
젊고 팬층이 두터운 분이다보니 어떤 해석을 볼 수 있을지 색다른 기대가 생겼다.

베토벤 말년 청력을 잃어가는 시점에 작곡을 시작 완전히 듣지 못하게 된 시점인 1824년 완성되어 초연된 마지막 교향곡
4악장 환희의 송가는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낙원에 들어선다는 내용으로 쉴러의 시를 기반으로 작사되었다.
합창단과 네명의 독창자가 환희의 송가를 노래하며, 이는 교향곡에서 최초로 사람의 목소리를 사용한 것이다.

꼭 청력문제가 아니더라도 베토벤의 인생은 고통과 슬픔의 연속이었고,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대체로 무겁고 심오하다.

베토벤의 인생에서 고통을 나열해보자면,
주정뱅이 아버지에 의해 어려서는 밥벌이의 도구로 키워지고,
청소년기에 어머니를 잃고,
청년기에는 청력을 상실하기 시작,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까지 고민,
실연을 겪고,
완전히 청력을 상실,
자식같은 조카가 자살을 기도,
유명한 귓병 외에도 상당한 지병이 꾸준히 더해지며 57세에 삶을 마감한다.

이런 인생임에도 베토벤은 음악사의 신약성서라 칭송받는 업적과 명언을 남긴다.

아무리 불행한 일도
무엇인가 좋은 것을 가져오기도 한다.

어릴때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 엄청난 음악적 업적을 이뤄낸 인간승리에 초점을 맞췄다.
나이가 드니 고난과 역경이 오히려 베토벤 작곡의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삶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가 베토벤에게 시간의 유한함을 계속 각인시켜 끊임없이 무언가를 끝맺고 남기도록 한건 아닐까.

부지런히 시간을 낭비하거나 나태하게 사는 것은 시간이 무한하다고 착각할때나 가능한 일일테다.
이제야 교과서적 이해를 넘어서는 어떤 깨달음을 얻고, 왜 베토벤을 모시는(?) 몇몇 지휘자는 그의 음악 이후로는 앙코르도 연주하지 않는지 이해하게된다.

오늘은 이런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이 유일한 프로그램으로 연주된 날
평소라면 이동시간도 있으니 뽕 뽑고싶은 마음에 서곡과 협주곡이 없음을 아쉬워했을텐데 오늘만큼은 다행스럽다.

다만, 컨디션 때문인지 무대가 성글게 느껴졌다.
1, 2악장은 매우 간결한 연주가 주문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음 사이가 허전하다.
음가가 짧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수평적인 흐름이 단절된 느낌
현파트 배치가 특이하게 vn1-vc&cb-va-vn2인데다 오늘 앉은 자리가 vn1의 대각선이다 보니 고음과 저음이 동떨어지게 느껴졌기 때문일 수 있겠다.
현파트가 간결하고 기민한 연주를 추구하는것과 달리 관파트는 칸막이 때문인지 굼뜨거나 뭉쳐지게 들려 이질감이 더 컸다.
그러다보니 연주시간은 거의 70분으로 너무 빠르거나 느리지 않았음에도 3악장은 균형을 잃고 지루하게 들렸는데, 바로 4악장에서 오늘의 파트배치에 무릎을 탁 쳤다.
고음과 저음이 붙어있으니 4악장 주제와 구조가 너무나 명확하게 들려서 이게 한방이었구나 싶어진다.
그리고 오늘의 vip는 심벌즈라고 생각된다.
4악장에서 공기반 소리반의 절묘한 심벌즈가 등장하자 음들 사이의 공백이 싹 채워지며 음악이 완성되는 느낌

갑작스런 지휘자 변경으로 새로운 해석이 충분히 전달되기까지 시간이 부족했을거라는 무쓸모 궁예질
그래서 더더욱 윌슨응과 서울시향의 합창교향곡을 제대로 들어보고 싶다.
하지만 특정 지휘자, 특정 오케스트라, 특정곡 앤드조건의 공연을 다시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르겠다.
일상은 그래서 일상이 아니기도 하나보다.

패키지가 일년이 아닌 분기나 반기로 판매되는 현실
격리에 띄어앉기에 매달 살얼음판을 걷는 공연계
장기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된다.
친구 흑설탕이 모처럼 합창에 관심을보여 다음달 설시향의 모짜르트 레퀴엠 연주도 예매완료
부디 다음달에는 나아진 멘탈로 여유를 가지고 감상할 수 있기를🙏


오늘의 커튼콜과 꽉차게 띄어앉은 관객사진으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