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바리톤 길병민 리사이틀 <우리의 가을> 네이버TV 생중계 관람 후기

인생은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아 여러모로 아프지만, 그럼에도 참 귀한 예술가가 지나간 시간에 후회가 남은 곳곳에 약을 솔솔 뿌려주는 뭉근한 시간이었다.

마지막까지 표를 구해보겠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했는데, 공연 전날 갑자기 격리를 해야할 일이 생겨 표를 구하지 못했던 것이 한 분이라도 더 이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표가 있는데도 못가게 되었다면 그 마음은 또 얼마나 서러웠을까.

아이고 어쩔수없다 하면서 네이버TV 생중계 관람권을 준비하고, 빔과 스피커를 마련해둔 과거의 나를 칭찬하며 감상준비 완료!!

잘 듣고있는데 갑자기 거실 인터넷이 버벅거리면서 흐름이 자꾸 끊겨서 방으로 옮겨 1부부터 다시보기 시작했다. 인터넷이든 장비든 정비를 좀 해야겠다.

베이스바리톤 길병민 리사이틀 <우리의 가을> 셋리스트 미리보기

공지된 대로 1부는 외국 가곡. 오늘 공연에 나오는 외국어가 무려 6개 국어여서 위 링크처럼 미리 가사를 익혔던 과거의 나를 기특해하며 첫 연주로 쥘 마스네Jules Massenet의 <엘레지Élégie>를 들었다.

떠나가 버린 존재와 시간에 대한 고통스러운 마음을 읊는 비가. <엘레지> 연주가 끝나고 공연 준비과정을 설명해주시면서 작년 겨울 길님이 느낀 고독에 대해 언급해 주셨는데, 올 봄과 여름을 보내며 많이 극복하셨다고 한다. 참 연주를 해도 그냥 쏟아내리는 고독이 아닌 정화된 고독을 담으려는 마음에 또 한번 감동한다.

이어지는 무대는 이료 킬피넨Yrjö Kilpinen의 Illalla(저녁에)와 포레Gabriel Fauré의 Les Berceaux(요람, Op23-1)으로 이별과 그리움, 무상함이 담긴 노래.
아직 삼십대도 되지 않은 젊은 성악가가 어째서 저런 감정을 연주에 녹여낼 수 있을까 놀랍고 아린 시간이었다.

토스티F.P.Tosti의 곡은 Tristezza(슬픔), Non T’amo Più(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리), Ideale(이상)으로 모두 세 곡이었고, 이 곡들은 지극한 사랑에서 오는 열망, 아픔, 동경을 담고있다. 모든 인류가 공감할 감정일듯 하면서도, 겪어본듯 그 농도는 엹어지는듯 아리까리할 감정이라 오히려 잘 표현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역시 믿고 듣는 길님의 토스티! 오늘 연주는 참 찐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연주될까도 궁금해진다.

페르난도 오브라도스Fernando Obradors의 Del Cabello Más Sutil(가장 부드러운 머리카락으로)은 오늘 연주곡 중 가장 빨간색. 얼마 전 시네마콘서트의 <Quizas, Quizas, Quizas>에 이어지는 뜨거운 너낌. 박수가 한박자 늦은것은 관객분들 머리 식히느라고...?

1부의 마지막 곡인 안드레아 쉴Andreas Scholl의 White as Lilies(백합처럼 하얀)은 예상외로 원어가 아닌 한국어로 개사되어 연주되었다. 어머니께 들려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연주하신다고. 개사된 우리말 가사에 고결한 사랑이 담겨있다.

2부 한국가곡은 공지된 셋리스트와 프로그램이 많이 바뀌었다. 하고 싶은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셨다고 하는데 오늘도 역시 옳았다. 이래서 마리우들은 언제나 믿게됩니다.

공지되었던 첫 곡은 민남일 선생님의 <연가> 였는데, 오늘 시작은 오병희 교향시 코리아판타지 중 <고래의 꿈>, 이어진 곡은 <마중>, <꽃때>, <시간에 기대어>,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이화우>, <바람이 머무는 날>

요즈음 부쩍 어린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꽤 힘들고 곤혹스러운 시간이다. 현명하지 못해서, 용기를 내지 못해서, 참아서 또는 참지 못해서, 어떤 순간은 피하지 못해서, 과욕을 부려서, 시간을 흘려버려서, 꿈을 꾸고만 있어서 미안해하며 꼬질이를 안아주는 것이다.

그 마음으로 무려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담은 <고래의 꿈>을 냅다 얻어 맞아버리니 부끄러움에 콧물을 흘리게 되는데...

<마중>, <꽃때>, <시간에 기대어>로 흐르면서는 대상이 나와 나인듯, 나와 남인듯 왔다갔다하며 이입했다. 한참 훌쩍이고 났더니 어쩐지 마음이 편해지고,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에 이르러서는 그럼에도 또 의지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삶이 강물같은 흐름이라는 깨달음이 와닿으니 길게 보고 흘러가보자 싶어진다.

<이화우>는 초견에 아 좋다 하는 버전이 잘 없었는데 드디어 만났다. <신고산타령>이나 <아리랑>에서도 느끼지만 길님 소리는 국악 가락과도 참 잘 어울린다.

2부의 마지막곡 <바람이 머무는 날>은 엄마와의 추억과 그리움을 담은 노래
어릴적 날이 쌀쌀해지면 엄마가 외투안으로 쏙 넣어서 안아주던 생각이 난다. 격리가 오늘로 못끝나면 추석까지 몇달째 기다리고 계신 부모님을 못뵐거같은데 어쩌나 걱정도 들고

문제는 1부를 좀 보다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더니 보는 중에 라이브는 종료되었는데… 화면을 잘못 건드려서 앙코르에서 딱 끊겼다😭 (제발 VOD가 발매되길)
두 곡은 하셨을거 같은데 팬까페에서 찾아보니 한 곡은 <연가>였던듯 한데, 또 뭐가 있었으려나…

생중계를 위해 녹음용 마이크가 배치는 되었지만 현장에서는 노마이크 생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무대에 참여하지 못해서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아쉽지만, 사진만 봐도 만듦새가 빼어나보이는 프로그램북을 못가진것도 아쉽지만…
여러모로 감동받고 케어받은 감사한 시간이었다💙

또 이번 리사이틀을 함께 꾸려주신 피아니스트 및 오페라코치 정태양 선생님의 내공도 다시한번 빛났던 오늘!
합의되지 않은 소개?에 수줍고 까리한 모습을 보이시는 소소한 재미도 있었다. (+ 다이어트 대성공의 위엄까지😳👍)

언제나 연주에 가볍지 않은 진정성이 담겨서 길님을 더 귀하게 여기지만, 이렇게까지 온 마음으로 하는 연주를 보면 무대 끝나고 진빠져서 어쩌누 걱정도 된다. 이런 오롯한 리사이틀은 더더욱 그렇다.

나이듦은 언제나 아쉽지만, 그럼에도 한가지 즐거움이 생겼다면 길님의 앞으로의 연주와 시간을 함께할 수 있는 것이다. 부디 귀한 연주가 오랫도록 계속될 수 있게 스스로도 주변에서도 컨디션 관리를 많이 챙겨주시길 바라게된다🙏